이번 여름에는 작년부터 벼르던 데날리 국립공원에서 일주일 동안 캠핑을 했다. 축축한 툰드라 위를 걸어보고, 블루베리 덤불 속에서 길도 헤매보고, 불곰 두 마리 사이에 껴 심장이 쫄깃해지는 순간도 겪어봤다. 또 가진 옷이란 옷을 다 껴입어도 밤은 얼마나 춥던지. 발밑을 흐르는 짙은 구름을 보고 식겁한 아침도 많았다. 가방끈이 끊어지려 하는 2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내리느라 고생이 많았지만,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빛을 받아 분홍색, 보라색 파스텔로 빛나는 데날리 산을 바라보노라면 말할 수 없는 벅참에 모든 걸 잊고 눈물이 쏟아질 듯 애틋해 했다.
이름도 모르는 먼 빙하 발치에서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이 수많은 다른 물줄기를 만나고, 협곡을 따라 흐르는 급류가 되었다가 평탄한 툰드라 위로 불곰, 무스, 카리부, 뇌조를 적시고 베링 해와 하나가 된다. 쉬지 않는 구름에 모습을 드러냈다 감췄다 하는 바위 능선은 고도가 낮아질수록 그 거친 기운을 잃어, 처음에는 땅에 바짝 엎드려 자라는 지의류에, 푹신한 수풀에, 낮은 덤불에, 그리고 이내 수목한계선을 지나 울창한 침엽수림에 그 피부를 내준다.
지금까지 ‘어머니 지구’를 농담 아닌 진지하게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지만, ‘어머니’보다 내가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느끼는 모든 감각과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는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도시인의 얕은 낭만주의로 자연을 그저 아름답게만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등산로도 없는 야생지에서 혼자 하이킹을 하는 건 살아있는 위험을 동반한다. 강을 건너다 급류에 떠내려갈 수도 있고, 발목을 접질릴 수도 있고, 낮은 확률로 야생동물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고 없이 내리는 눈과 비에 홀딱 젖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밤에는 항상 저체온증의 위험을 안고 잔다. 하지만 그 속에서 자연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걸 배운다. 어머니는 의인화된 신이 아니다. 어머니는 요구하지도, 벌하지도 않는다. 자연(自然)의 어원이 알려주듯이 어머니는 ‘스스로 그러하다.’ 매일 아침 텐트를 접으며 보내는 기도는 그의 주름 사이를 좀 더 사뿐히 걸어 다닐 수 있길 바라는 나 자신을 향한 다짐이다.
데날리에서 8월의 셋째 주를 보내고 9월 초 페어뱅크스로 올라가니 알래스카의 짧은 가을이 지나간다. 자작나무는 이미 반짝이는 호박색 잎을 날리고, 간간이 서 있는 무심한 가문비나무가 바로 그 낙엽을 어깨에 걸치고 바람을 버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주위를 살펴보면 몇 발자국 떨어진 나무둥치에 얼룩다람쥐가 땅을 열심히 파대고, 고개를 들면 멀리 호수 위로 캐나다 기러기가 브이 자로 줄지어 어디론가 날아간다. 물론 5년 전 상상했던 알래스카와 똑같은 이 풍경을 온종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데날리에서 배웠듯이 마냥 좋은 분홍빛 낭만은 환상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밥을 해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밖에서 거닐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한 시간 반. 짧은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면 책상 위 화학 과제가 기다리는 게 대학생의 일상이다. 그래도 지금이 내가 가장 있고 싶은 곳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복 받은 시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알래스카에서 맞는 두 번째 가을, 딱히 더 바랄 것 없는 하루하루가 좋다.
2015년 9월 12일, 페어뱅크스